양사언의 화락문조성(花落聞鳥聲)
봉래 양사언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시조의 주인공
그는 강원도 고성군 구선봉(九仙峰)아래 감호(鑑湖) 부근에 정자를 지엇다. 정자 이름을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란 뜻의 비래정(飛來亭)이라 지었다.
고래의 수염으로 큰 붓을 만들어 정자 편액 글씨를 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 비(飛) 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글자의 한 획 한 획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꿈틀거리는 용의 기상이 완연하였다. ‘비’ 자에 이어 ‘래(來)’ 자와 ‘정(亭)’ 자를 내리썼으나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없이 비자로만 족자를 만들어 정자에 걸었다..
1584년 어느날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쳤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고 나가 공중으로 흩날려 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 모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펴보니 그 족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바다를 향해 날아가메 이를 뒤쫓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뒤 가깝게 지내던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유근, 飛字記)
***양사언의 일생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양사언의 출생인연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자는 응빙이고 주부를 지낸 희수의 후처의 아들이었다. 그는 법적으로 서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서자로 알게 된 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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