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의 화락문조성(花落聞鳥聲)  

 

봉래 양사언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시조의 주인공

 

그는 강원도 고성군 구선봉(九仙峰)아래 감호(鑑湖) 부근에 정자를 지엇다. 정자 이름을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란 뜻의 비래정(飛來亭)이라 지었다.
고래의 수염으로 큰 붓을 만들어 정자 편액 글씨를 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 비(飛) 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글자의 한 획 한 획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꿈틀거리는 용의 기상이 완연하였다.  ‘비’ 자에 이어 ‘래(來)’ 자와 ‘정(亭)’ 자를 내리썼으나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없이 비자로만 족자를 만들어 정자에 걸었다..
1584년 어느날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쳤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고 나가 공중으로 흩날려 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 모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펴보니 그 족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바다를 향해 날아가메 이를 뒤쫓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뒤 가깝게 지내던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유근, 飛字記) 

 

***양사언의 일생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양사언의 출생인연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자는 응빙이고 주부를 지낸 희수의 후처의 아들이었다. 그는 법적으로 서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서자로 알게 된 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는 천성이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한번은 백두산까지 올라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변을 지날 때 낮잠에 말죽을 먹이고자 주막에 다다랐으나 집집마다 문을 잠그고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냇가에 한 어염집이 보여 거기를 찾아가게 됐다.
 이때 마침 집주인은 들일(혹은 계회)나가고 열여섯 살 소녀가 혼자 집을 보고 있었는데 점심 시중을 들고, 말죽 한 통을 먹이는 것이 아주 곱고 영리해 보였다. 양희수는 떠나면서 이 아리땁고 친절한 소녀에게 사례를 하려 했으나 굳이 사양하며 접빈객은 사람의 도리일 뿐이라고 했다. 이에 양희수는 더욱 소녀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감사의 뜻을 남기고 싶어 손부채에 달려 있던 향합을 풀어주니 이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 후 몇 해 뒤 소녀는 그 향합을 들고 양희수를 찾아와 "여자의 행실로 사람의 신물을 받고 어찌 다른 데로 시집가리오"라며 한사코 말리는데도 기어이 양희수의 집에 들어와 살았다. 양희수는 처음엔 소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정성으로 집안 살림에 힘썼다. 마침 양희수는 상처하였던지라 소녀를 맞아들여 본ㅊ가 쓰던 방에 들게 하고 가정 살림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겼는데 그가 곧 양사언이다. 조선 사회에서 후처는 첩과 달라 정실과 똑같으니 양사언은 서자가 아닌 것이다. 

출처: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하,유홍준 p.205-p.206

 

***

 

유명한 그의 초서는 뱀과 용을 풀어 풀어놓은 듯하다는 평을 들었다..광풍이 몰아치는 듯..하여 광풍체라 명명한다..

 

**양사언의 시

 

山岳爲肴核(산악위효핵)  높고 낮은 산을 안주로 삼고, 
滄溟作酒池(창명작주지)  푸른 바다물로 술 못만들어
狂歌凋萬古(광가조만고)  미친 노래 불러 옛일을 슬퍼하니  
不醉願無歸(불취원무귀)  취하지 않으면 아니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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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모처럼 가슴에 뭉클거리는 느낌을 받은 영화..

아카데미 남녀 조연상을 받은 배우들..모자(크리스천 베일과 멜리사 레오)가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가슴에 오래 남는다..

 

9남매를 기르는 모친..

슈거레이 레너드를 다운 시켰다고 큰 소리치는 퇴물 복서 큰아들의 재기를 꿈꾸나, 큰 아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자신이 다큐촬영이 무슨 컨셉인지도 모르고 희희낙낙하고 다닐뿐..

형을 우상으로 여기는 둘째아들은 그저 매맞는 복서로 대충 관리하면서..

작은 아들의 출전을 위해 큰 아들을 찾으러 마약동네로 찾아가서 창문으로 도주하려던 아들과 마주치고..

차안에 돌아와 낙담하는 모친..제딴엔 모친을 위로한다고 아들이 부르고 결국 모친도 따라부르던 노래..

 

정확한 가사는 기억나지 않으나 대충..

 

나홀로 웃어도 세상 사람들은 다 운다..

내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 모르면서  (운운)

 

작은 아들이 연애를 하면서 생긴 자각..

모친과 형을 배제하고 새로 팀을 짜..연승가도를 달린다..

 

연승가도의 정점..

미국의 신예 20 KO 승의 강자 산체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형을 면회한다..형으로부터의 자립을 선언한다..

 

연습하는 과정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가 인상에 남는다..

대충..

나는 홀로 길을 간다..힘들고 험한 길이라도..(운운)

 

결국 인생이란  무언가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길을 가면서 행복을 찾는 여정 아니던가..

 

형은 자신의 다큐가 마약의 위험을 알리는 내용이라는 사실과 거기에 자신 아들이 등장하는 화면을 보고 충격을 받고 새로운 자각에 이르러 마약을 끊는다..

 

산체스와 힘든 경기..그러나 형의 조언대로 전략을 수정하여 승리..

 

형의 출소..형과 모친과의 화해..모든 팀웍의 재조정..

드디어 WBU 정상 도전..

그 가족들이 가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에서 승리한다..

 

형 : "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해냈다..

동생 : 아니, 우리가 해냇다..

 

이영화가 실화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에 가슴에 자극을 주었나..

 

인생이란  무언가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길을 가면서 행복을 찾는 여정...

동생은 자각을 통하여 형과 모친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길을 갔다..

형은 자각을 통하여 마약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길을 갔다..

 

형제와 모친은 각자 주인공이 되는 길에서 합류하여 새로운 길을 걸어갓다..

 

옛길이 끊어진 곳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말..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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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용기

 

 

취향이 좀 유치해서 그런지 영화라면 뻔한 내용의 로맨틱코미디를 즐겨 보는 편인데, 이번엔 진지한 걸 한 편 보려고 점찍어 둔 게 있다. 얼마 전 열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킹스 스피치’다. 말 더듬는 콤플렉스 때문에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기를 끔찍이 두려워했으나 마침내 이를 극복한 영국 왕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자신의 한계 인정해야 도움 청해

심프슨 부인과의 세기의 스캔들로 왕위를 포기한 형 대신 국왕에 오른 조지 6세는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다. 예고편을 보니 그는 혼자 힘이 아니라 괴짜 언어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언어장애를 이겨낸다. 국왕의 드높은 자존심을 접고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인 행동이 용감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남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므로.

왕이든 평민이든 살다 보면 인생이 친절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살다가 보면/넘어지지 않을 곳에서/넘어질 때가 있다/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이근배의 ‘살다가 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 오르기 힘들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 앞에 섰을 때가 있다. 그땐 부끄러워 말고 도움을 청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이 조직에서 성공한다는 게 우리의 신조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시라는 점을 믿어주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의 CEO 윌리엄 그린의 말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 수용하는 것은 자기 문제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다’만 너도나도 외치다가 내 안의 고민도, 조직의 문제도 더 곪게 만드는 헛똑똑이놀음과는 대조적이다.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은 처세의 면에서도 지혜로울 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근대 미국인의 생활 기초 구축에 기여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주 의회 서기로 공직에 처음 나설 때 일이다. 의회에서 그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한 의원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그에게 잘 보이려 하는 대신 의원이 소장 중인 희귀한 책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책을 돌려줄 때 감사 메모를 보냈다. 프랭클린을 외면하던 의원은 다음번 마주쳤을 때 먼저 말을 건넸고 둘은 평생 우정을 맺었다. “당신이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보다,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친절을 베푼 사람이 다시 친절을 베풀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은 프랭클린의 ‘생활의 달인’다운 통찰이다.

벽이 가로막으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주저앉기보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라도 일어설 방도를 찾도록 애써야 할 이유다. 내게 간절한 꿈과 열정이 있다면, 열린 마음이 있다면 나를 도와줄 사람은 꼭 존재한다는 믿음과 함께.

마음 열면 도와줄 사람 다가와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도종환의 ‘담쟁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겸손한 용기다. 단, 내 몫을 다 하고 나서. 한 여성의 자아발견 여정을 그린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오래된 유머가 등장한다. 날마다 성인(聖人) 조각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참다못한 성인이 어느 날 나타나 외친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을 사라.”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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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편액의 좌측 밑에 ‘주지번서(朱之蕃書)’라고 선명하게 양각돼 있는 ‘망모당’은 글자 그대로 ‘멀리서 추모한다’는 뜻이다. 표옹의 집에서 바라다보면 전방 10리 거리에 표옹 부모의 묘소가 보이는데, 표옹은 부모를 기리기 위해 망모당이라는 글귀를 주지번에게 부탁한 것이다

 

(출처 : 조용헌 저, 명문가이야기)

 

***

 

고금동서, 사람의 인연과 의리를 생각한다..

요즘 흔한 말로 하면 "있을 때 잘해!"

베품의 미학을 느낀다..

 

 

중리 해변촌에서 감지해변으로 가려면..

바다를 등지고 바로 산으로 오른다..

 

 

지대루된 산길이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수건을 꺼내 땀을 연신 닦는다..

 

 

 

중턱에 올라 평탄한 임도가 끝나고 내려가는 길..저멀리 1박2일 여파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감지해변 자갈마당 조개구이집들..

 

 

 

그 포장집 중 이름에 끌려 부산 갈매기 집에 들어간다..

홍합..각종 조개 연탄불에 구워먹고..

요즘 이곳은 방송 덕분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이승기, 이대호가 같이 먹었다는 독도집은 이날 아침 부근 포장집의 화재로 영업중지상태다..

그야말로 불티나게 잘나가다 정말 불이낫나 보다..

 

 

 

 

점심 식사후에 태종대로 걸어간다..

동백꽃이 눈에 띈다..아름다운 붉음..해볕에 반사되는 이파리는 동백기름을 바른듯 반들반들..한여름의 녹음이다..

붉은 동백꽃..흰갈매기..파란 하늘..흰구름..붉은 등대..푸른 바다..

 

 

태종대 순환도로는 구식이다..

순환열차형 버스가 다닌다..요즘 걷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좀 해야하는 것 아닐까??

 

 

 

예전 자살바위 자리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남해를 바라본다..

녹솔 벽해..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푸르름..

 

 

 

등대..

존재만으로도 지침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의사 가운처럼 흰옷을 입고 푸른 바다를 진찰한다..

 

 

그러한 잠시 두 남녀는 패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푸른 창공을 노저어 간다..

험한 구름넘어 저편 언덕..희망의 나라로..

  

 

 

인어 아가씨..

등대를 도우러 나섰다..몸소 횃불을 들고서..무엇을 밝히려는가? 자유? 정의? 진리?

 

 

신선이 놀고 갔다는 신선바위..

신선놀음에 동참하려는 마음에 부리나케 내려간다..

 

 

 

신선바위에 신선은 없고 푸른 파도와 흰 갈매기만 옛 호시절을 증언하는듯..

 

 

영도 등대에서 선전원 밀에 현혹되어 유람선을 탔다..

태종대를 바다에서 감상하리라..

 

여기는 전망대..직하 삼천척..전에는 자살을 노리던 곳..이제는 살자를 꿈꾸는 전망을 바라보는곳..

 

 

 

 

주변풍광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선장이 새우깡을 권유한다..

갈매기가 모여들고..저 녀석은 제데로 묘기를 부려 새우깡을 입에 물엇네..

 

 

감지해변 선착장에 다가가자..

다른 유람선이 떠난다..오빠부대 갈매기를 이끌고..

 

 

남은 시간 자갈치 시장을 걷는다..현대식 빌딩으로 변한 시장 옆에 예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좌판..

그 곳에서 제일횟집에 들어간다..부산소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오늘의 기분을 묻는다면?

하이든의 첼로협주곡을 듣는 기분이랄까..

 

 

 

그렇게..쐬주한잔에 업된 기분으로 부산오뎅사러 광복동 거리를 헤메다가 부산역에 도착하니 그곳에서 팔더라는 얘기..

자갈마당..자갈치..남포동..광복동..그렇게 부산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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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해안길에서 만난 오늘의 상징)

 

부산 갈맷길 걷기에 나섰다..

이번은 영도 남항대교 부근 테크노고교 - 중리해녀촌 - 감지해변 - 태종대 - 전망대 - 영도 등대 - 유람선- 감지해변 총 13km 거리..

 

 

부산역에서 내려 택시로 영도 동삼동 테크노고교(또는 반도보라아파트) 가자고한다

요즘 영도 대교는 공사중이라 부산대교를 넘어 금방이다..요금은 3500원 정도로 가깝다..

산책로 입구가 뚜렷하여 찾기는 쉽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닷바람..잠념을 지워주는 끊임없는 파도소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시원하다..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

삼한시대..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말의 목장으로 유명한 곳..말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일 정도라 절영(絶影)도라 했다던가..

타일 벽화에도 절영마의 기개를 그려놓았다..

 

 

 

 

 

부산 갈매기..

넘실대는 파도와 그 위를 넘나드는 자유..

해변에서 갈매기 소리만 들어도 나는 자유를 꿈꾼다..

 

 

 

문득 해변길이 끝나고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길을 넘어야 중리해녀촌으로 갈수 잇다..

그 단순한 계단에 무지개색을 올렸다..이름하여 피아노계단..

 

 

피아노 계단을 올라 가쁜 숨을 돌리며 바라보는 해안..컨테이너 선들이 줄지어 떠서 대기중이다..

 

 

콘크리트 계단에 조약돌을 수 놓아 꽃도만들고 돌고래도 만들고...

 

 

해안 절벽하나를 넘었다..거기서 만나는 오붓한 파도..

 

 

자갈길을 지나면 파도는 더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정말 수다스런 친구...

 

 

길은 정겹게 이어진다..세멘길을 꽃길처럼 즈려밟고 간다..

삼면의 바다길을 연결하여 걷고 또 걸었으면..

 

 

다시 해안이 다하면 돌계단이 나오고..

계단에서 숨소리와 친구하고 해변에선 파도 소리와 동무한다..

 

 

 

계단을 내려와서는 다시 해변을 걷고..

해안길이라 평탄하리라 생각한 내 예상과는 달리 제법 업다운이 있어 운동량도 상당하다..

 

 

거기서 나를 만난다..

바다와 산 그리고 구름 속에 감싸인 신선같은 모습으로..

 

 

출렁다리....몇번 굴려 스릴감을 증폭시켜보고..

평지풍파의 즐거움이라 할까..

 

 

 

 

 

 

그 길에서 물고기..갈매기..돛단배도 만난다..

 

갈매기 바다위에 울지 말아요          

물항라 저고리에 눈물 젖는데

저멀리 수평선에 흰 돛대 하나

오늘도  아 ~  가신님은  아니 오시나

 

 

 

 

중리해녀촌에 도착하니 갈매기가 반겨준다..

해녀촌엔 문어 멍게 해삼 좌판이 즐비하다..제법 걸은터라 허기가 느껴지는 찰나..

 

 

마침 그곳 할매가 마수좀 해달라고 붙잡는다... 잠시 상에 걸터 앉아 푸른 바다 바라보며 멍게.. 해삼 향을 맡아 본다.

이제 감지해변으로 가야지...

스승이 배우기를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글씨를 써오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서법을 모른다고 했다,

 

"서법에는 관계하지 말고 붓가는대로 써 오너라."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글씨를 써왔다. 글씨를 본 스승이 말했다.

 

"서법으로는 전연 맞지 않지만, 그러나 이 가운데는 순일한 맛이 있다.

세상에 시,서를 배우는 자가 무위지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따지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제자들이 서법이라는 서자도 모르고 시란 시자도 모르면서 오히려 그 글과 시에 순전한 기가 있는 것은 마음가짐에 전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러므로 시를 배우는 자,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면 시를 말할 수 없다. 서를 배우는 자,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 서를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비단 시서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道도 이와 같다."

도연명의 시에서 따온‘차중유진의(此中有眞意)’를 쓴 소암의 작품. ‘이 가운데 참뜻이 있다’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제공


 

  • [리뷰]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췄다”
  • 현중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
  • 김양동·계명대교수(서예·전각)
    입력 : 2007.06.19 00:28 / 수정 : 2007.06.19 00:28
    •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경지. 소암 현중화(1907-1997)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18일 폐막) 감상하고 느낀 한마디 소감이다.

      제주도 서귀포에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붓 한자루로 고결한 생애를 마친 묵선(墨仙) 한 분이 계셨다. 길고 긴 흰 수염, 펄럭이는 두루마기 차림의 훤칠한 키, 그 모습에서 이미 탈속의 풍자를 느끼게 했던 분이 바로 소암 선생이다. 선생은 약관에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과 전문부를 마친 엘리트 서예가였다. 재일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소암은 일경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한 피신의 수단으로 일본의 서도대가 마츠모토 호우수이(松本芳翠)의 문하생이 된다. 이것이 결국 그의 예술적 자질을 자극한 계기가 되어 그는 글씨에 대한 흥미 수준을 넘어 본질적 접근과 탐구를 하게 되었다. 육조(六朝) 서체를 비롯한 각체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1955년 49세 때 귀국한 소암은 51세(1957)부터 국전에서 활동을 시작, 당시 한국 서단의 대부격인 손재형으로부터 ‘서단의 이채로운 존재’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는 90평생 소암 예술의 성취 부분 중에서 특히 만년의 미발표작 100여 점을 중점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종횡무진한 소암 예술의 진면목과 예술적 가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암의 서예세계는 고전을 철저히 학습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걸러낸 다음, 유, 석, 도(儒釋道) 삼가(三家)사상을 혼융한 내용을 개성적인 표현으로 자재롭게 구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행초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질탕하고 표일한 흐름, 미친 듯 분방한 봉망에서 터지는 격정과 묵기 임리(淋?)한 획질, 그 율조와 흥취는 만리를 달려온 진애를 한꺼번에 씻어 내는 소나기의 시원한 바람같은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 백미는 취필(醉筆)이다. 코냑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았다던 소암, 그런 풍류와 낭만이 있었기에 취시선(醉是僊·취하면 그것이 곧 신선이다)과 같은 큰 글씨의 광초(狂草) 벽서(壁書)를 남겼다. 취시선은 어느 요정에서 흥건히 취한 소암이 고은 베로 도배를 한 벽에 휘갈겨 쓴 초서로 글자 한자의 크기가 사람 키와 같다. 취시선 앞에선 서예를 모르는 사람도 탄성을 토하며 서예가 바로 이런 멋이었구나 하고 금방 붓을 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이다.

      소암은 현실의 명리에 대한 체념을 글씨로써 초탈하여 달관의 경지에 오른 진정한 필묵의 자유인이었다. 세속으로부터 자기해방을 하고자 했던 대서예가 소암의 글씨에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90평생 ‘먹고 잠자고 쓰고’ 했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취묵신선이었던 소암선생, 그는 이 시대 필묵으로써 자아를 완성했던 보기 드문 거인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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