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은 코로나로 5인이상 집합금지란다. 

미리 애들한테 설에 집에 오지말고 영상으로 새배하라고 선언하고..

경주로 캠핑을 떠난다.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일단 포항에 들러 이명박 생가, 곤륜산, 죽도시장, 연오랑 테마파크를 구경하고(후기는 나중에 올림), 4시쯤 나정 고운모래 해변으로 향했다.

 

원래는 나정 해변이 공사중이어서 울산 관성솔밭 해변으로 가려다가 혹시나 하고 들렀는데..헐..

엄청 많은 차량들이 주차하고 텐트를 치고 있다.

 

일단 지형정찰을 하는데, 우리와 같은 코베아 텐트를 보니 반갑다.

더 반가운 것은 한적하게 텐트칠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서둘러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를 치고, 등유난로에 불을 켠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구입해온 왕문어 숙회를 얇게 썰어 와인과 곁들여 먹으니 감동의 쓰나미..ㅎ

 

 

취기와 다리의 네온불빛 그리고 폭죽소리의 삼합의 격려 속에 1일차 꿈나라는 행복했다.

 

2일차 아침..

구름으로 일출은 선명치 않았지만, 상쾌한 바다 바람은 분명코 봄이 왔음을 단호하게 알려준다.

 

텐트 옆 다리가 범상치 않아 걸어보니 해파랑길을 이어주는 다리다.

문무왕릉과 감포 깍지길 사이에..

 

 

더구나 이 다리는 만파식적의 대금을 형상화 하여 만든 다리다..

만파식적..

신라 신문왕 시절, 동해의 용을 자처한 아버지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작하여 보내준 보물급 대금이 만파식적이다.  괴질이나 변란시에 불면 나라의 근심이 해결된다는 국보..

요즘 코로나 시절에 만파식적으로 송가인 신곡 꿈을 불면 딱 결판이 나는데..

사라졌으니 어쩌나??

 

 

다리 옆 그림을 보니 만파식적을 대금이 아니고 단소로 그려놨네..

봉황 대신 꿩이고, 꿩 없으면 닭이라고..

나라도 단소를 들고 한곡조 불러본다.

코로나!! 

"이 썩을 넘아! 썩 사라지겠느냐!"

 

 

캠핑의 재미는 먹방만이 아니다.

긴 낮동안 뭔가 해야 한다.

바닷가에서는 낚시를 많이 하는데, 우린 트레킹이다.

2일차는 송대말등대 수족관길과 경주 무장봉 억새길을 걸었다.

그리고 돌아와 문어 라면으로 행복했다..

 

 

난로에 뜨거운 물이 가득이라..

이번에 대야를 가져와 족욕을 즐겨본다.

소싯적에..

발씻은 물을 두고, 형과 내기를 했다.

한 모금 마시면 100원 줄께..

설마??

형은 마셨다.

동생은 100원 안주려다 맞고 울었다.

 

그 추억에 잠겨 동행에게 물었다.

돈을 줄테니 발씻은 물 마실래?

싫단다..ㅎ

"난 1억주면 마신다"

"그래? 난 5000주면 마신다"

"3000주면 300cc 까지 마실 수 있다"ㅎ

그러나, 2000이하로는 서로 사양하기로 ㅎㅎ

 

 

3일째 아침 우아하게 클래식을 들으며 게으름을 피니 행복이란 놈이 발목을 잡는다..ㅎ

 

떠나면서 보니 설을 지내고 나온 차량이 더 가득찼다.

코로나라고 가족도 5인이상 모이지 못하게 하면 뭐하나??

모두 명소마다 가득 모여 모르는 사람끼리 복작거리니..

코로나는 모르는 사람은 봐주나??

 

양산8경 둘레길을 마치고, 금산 제원면 천내리 난들 기러기 공원을 찾았다.

최근에 강변 데크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4대강 사업 이전의 모습은 보면 이렇다.

인공폭포가 인상적이었던 시절이 잇었다.

 

 

<참고 왕년의 천내리 모습>

1. 2010년  blog.daum.net/servan/6348357

2. 2011년  blog.daum.net/servan/6348622

3. 2011년  blog.daum.net/servan/6348558

 

 

강변의 경관도 바뀐다..

이제는 차박, 캠핑과 강변테크길이 대표 선수가 된 것 같다.

 

기러기 공원에 차를 세우고 세월교를 걸어 건넌다.

금강은 여전하나, 부엉산 터널이 뚫리고 다리가 생기고 테크길이 개설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어린 시절 본 강을 목표로 하는 자연보호 운동은 불가능하다.

그 시절 강도 변해온 것이기에..

 

여기사 인공폭포가 있던 자리이다.

시원한 물줄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구나.

세상인심 변하듯 하구나..

 

그러나 강변데크길은 어디서나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부엉산 터널위로 데크길은 이어지는데..

 

 

 

전망대에 올라오면 부엉산과 자지산으로 가는 길이 기다린다.

인생도 그렇다.

한고비 넘으면 새로운 길이 기다리듯이..

 

산마루에 오르면 반대쪽 금강의 전망이 보일까 싶어 올랐으나, 

무심히 부엉산만 가리키는 표지판에 발걸음을 손절하고 미련없이 돌아선다.

"이미 충분히 걸엇다 아이가"

 

돌아오는 길, 기울어가는 햇살이 친구처럼 다정하게 어깨동무한다.

 

갈테면 가라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햇살이 낮달같은 

백일의 시절이야말로

밝으면서 어둡지 않은

호시절이 아니던가?

 

 

그렇게 오늘에서야 통성명한 부엉산과 좋은 인연 맺고 

귀가길에 오른다.

오랜만에 영동 양산8경을 찾았다.

강선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까치 아파트와 장독탑이 들어 온다.

 

오! 그동안 강선대가 이쁘게 단장했다.

약간의 성형수술로 더 이뻐진 것은 원래 자연미인이었기 때문이지..ㅎ

 

새로 지어진 등선정에 신선처럼 오르면 멀리 비봉산이 봉황처럼 날렵하게 자리 잡는다..

 

강선대에 올라 용암과 송호리 솔밭을 흐르는 금강을 바라본다.

그 옛날 시인 묵객이 이 정자에 올라 시 한수에 술 한잔 하였으리니

현존하는 것은 선조때 사람 동악 이안눌의 시다..

 

신선이 이 대에 내렸음을 들었나니

옥피리가 자주빛 구름을 몰아 오더라

아름다운 수레 이미 가 찾을 길 없는데

오직 양쪽 강 언덕에 핀 복사꽃만 보노라

백척간두에 높은 대 하나 있고

비 갠뒤 모래 눈과 같고 물은 이끼 같구나

물가에 꽃은 지고 밤바람도 저무는데

멀리 신선을 찾아 달밤에 노래를 듣노라

 

전에 없던 둘레길로 단장하여 반갑게 걷는다.

 

나에게 강변 오솔길은 언제나 정답이다.

 

이 금강변에 제주의 돌하르방은 어인 행차신가?

 

앞서가는 어린아이 가족 모습에서 30년전 내 모습이 어른 거린다.

아이들은 다 커서 날아가고

이제 신선 모습이 되어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다.

 

영동에 처음올 때 양산도를 영동지역 민요인 줄 알고 들으면서 왔다.

하지만 이 지역의 노래는 신라때 양산가이고, 무열왕 때 요석공주의 남편 김흠운의 전사와 관련이 있다.

 

벼루길 나무 한참 위로 비닐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지난 여름 강물의 수위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사실, MB 시절 4대강 정비로 제방을 높히지 않았으면 피해가 더 컷을 것이다.

기사 검색해보니, 상류 용담댐의 방류 방법의 부적정으로 피해가 컸다고 주민들이 엄청 항의하는 모양이다.

 

함벽정이 단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함벽정..

푸르름에 젖는 정자..

내려다 보는 강물이 푸르다.

 

涵碧亭(함벽정) 創建韻(창건운)

 

幾多精力費斯亭 爲愛煙霞供養汀

巖石幻影雲絶壁 柳槐交影月空庭

湖光不盡楊州白 野色無邊海岱靑

勝日登臨皆聖賜 一聲鳴鳳使人醒

丹山老愴 書

 

얼마나 많은 정력을 이 정자에 쏟았는가

강안개 사랑하여 물가에 지었다

암석은 아른아른 구름은 절벽이요

버들과 괴목이 달빛에 비친다

호수 빛이 끊임없으니 버들강변은 밝고

들 색은 가없는 바다처럼 푸르니

좋은 날 올라보면 모두 성은이라

봉황새 한소리에 취한 술기운이 달아난다

 

함벽정에 앉아 단소를 꺼내들어

그 옛날 봉황 다시 한번 불러본다. 

 

봉황은 기색없고 오리만 촐랑 촐랑..

 

봉양정..

동문수학 13명의 동창이 이 정자를 짓고, 봉황새가 아침에 울고 가기를 기원했다.

정자 마루에 앉아 따뜻한 볕을 반찬삼아 점심을 먹는다..

 

멀리 비봉산에 봉황은 잘있는고?

 

강건너에도 30년전의 내가 어른거린다.

세월이 흐르는 강물같구나..

 

 

봉황대가 홀로 우뚝하게 있다.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인사하고 돌아선다.

 

세월교를 건너 강길을 따라 송호리 솔밭으로 간다.

 

동행에게 물었다.

다이아몬드 여왕과 하트 여왕 중에 무엇을 고르겠느냐?

그녀는 다이아 여왕이 되고 싶어했다.

다이아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란다.

 

데스페라도는 달랐다.

"이봐, 다이아몬드 퀸을 너무 좋아 하지마..

다아아몬드 퀸은 맘만 먹으면 너를 망가뜨릴 수 있어..

하트 퀸이 언제나 너의 확실한 패라는 것 잘 알잖아.."

 

 

돌아오는 길에 강건너 봉양정과 함벽정과 눈인사를 나눈다.

 

함벽정에는 각자 행복하게 푸름에 젖는 만물이 가득하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장면을 보다가 승천 기회를 놓친 용암이 패자부활전을 고대하고 있다.

 

송호리 솔밭에는 여의정이 있다.

 

만취당 박응종이 낙향하여 소나무를 심고 만취당 정자를 짓고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여의정을 지어 기념한다.

만취..늦게까지 푸르게 살겠다는 말씀은 송림이 다 이루어 주고 있다.  

 

여의정..뜻대로 이루어 지기를 기원하는 집..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원하는 사람과 할 수있는 것이 여의(如意)이고 자유이고, 행복아니던가?

 

선녀의 심부름으로 백로가 내려왔나? 

강선대와 용암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 잡았다.

 

30년 전에는 애송이라 비웃더만

이제는 타박 않으니 신선 티라도 나는겐가

선녀와 용암의 사연에 누가 귀기울일까?

백로의 날개짓만 물결을 더 푸르게 하는구나

 

<오늘 걷기> 강선대 - 함벽정 - 봉양대 - 세월교 - 강길 - 여의정 - 봉곡교 - 강선대  약 6KM

진산 순례길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장태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제2주차장에 차를 대니 스카이 워크가 코앞이다.. 

 

오늘은 형제봉 정상에 올랐다가 팔마정으로 거쳐 오는 코스를 잡았다.

 

장태산 와본지가 언제인지 거반 5년도 넘은 것 같은데..

못본 사이에 이뻐진 것 같다.

여자라면 다시 찝적거리곻 싶을 정도로..ㅎ

여름에 메타 세콰이어 숲에서 낮잠자면 좋은데..

세콰이어가 체로키 인디언 현자의 이름이라는 것 이제야 알았네

메타는 나중(후)..이란 의미..

 

생태연못을 돌아서 등산로 입구를 찾는다..

 

중생을 어린이 처럼 돌보는 보살이 요즘엔 코로나도 다스리시겠지?

 

형제바위로 올라간다..

 

형제바위에서 바라보니 스카이워크와 출렁다리가 장남감이다..

 

형제봉 정상에서 장태루 전망대로 오른다..

 

장대보다 더 크다해서 장태다.. 

 

저 아래 장안지와 팔마정이 한폭의 그림이다..

 

조만간 다시와서 온 종일 장태산 둘레길 10KM 짜리를 걸어야겠다.

다리가 회복되니 이리 좋은 것을..

 

다시 돌아온 형제봉에서 팔마정 방향으로 하산한다.

 

전망대에 서니 팔마정이 손에 잡힐긋 가까워진다..

팔마??

이곳 지형이 8마리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팔마정에서 단소나 불어야겟다 하고 갔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이 오는지 얼릉 돌아왔다는..ㅎ

 

팔마정 직전에 출렁다리가 있다.

요즘 국내 최장 출렁다리를 다툼이 한창인데, 이것은 최소 출렁다리급에 출전해도 되겠다..ㅎ

 

8마리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팔마마을이 있었는데, 장안저수지가 생겼다.

지명을 지을 때 잘 지어야 한다.

팔마정에서 바라보니 수백마리의 철마가 지나다닌다..ㅎ

 

돌아가는 길에 메타세콰이어 오솔길을 만났다.

 

이 숲을 만든 송파 임창봉..

1973년 토건업으로 번 돈으로 장태산에 메타세콰이어를 심기 시작했다.

남은 노른자 땅에 부동산 투기할 때 그는 30년 동안 23만평 임야에 200억원을 투자해서 숲을 조성했다.

그러나 IMF때 부도가 났다.

그는 4명의 아들을 설득해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대전시에 소유권을 넘겼다.

그후 장태산 한 구석에 컨테이너에서 생활해오다 당뇨병 등 합병증에 시달리다

2002년 81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오늘 걷기> 제3주차장 - 스카이 워크 - 생태연못 - 형제바위 - 형제봉 정상 - 장태루 - 팔마정 -

                  메타세콰이어 오솔길 -  제3주차장 약 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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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진산사건.. 윤지충..을 배울 때 그 현장을 방문하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출발점을 가려면 내비에 "산그림 펜션" 또는 "자작나무 펜션"을 치면 된다.

두 집 사이에 길이 있으니..ㅎ

 

길은 옛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올드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이 난다.

마치 송가인이 부르는 한많은 대동강이 노래는 옛노래되 창법은 새로운 것처럼..

 

코로나의 거리두기 시절에 맞게 이 길에서 딱 한 팀만 만났다.

 

짧은 오르막을 숨차게 오르면 대전과 금산의 경계 능선이다..

마근대미재..

막은 덤이..사방이 산으로 막혔다는 의미가 진솔하게 묻어나는 지명이다.

내려갈 동네 이름이 막현리..말 그대로 막혔니? 다..ㅎㅎ

 

근데, 문제는 출발점 지도에는 순례길 코스가 마근대미재에서 막현리로 가는 것인데,

여기서는 능선따라 배골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잠시 들마루에 앉아 쉬면서 생각하다가 원래 출발때 부터 염두에 두고 온 막현리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최근에 코스를 능선- 배골 코스로 변경 개설한 것 같다.

그러면 출발 안내판에도 코스를 바꿔 표시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막현리로 내려가는 풍광에서 뉴질랜드 루트번 트레킹의 추억을 떠올려서 좋았다..

 

언제 코로나가 물러나 다시 외국 명품트레킹 코스을 걸어볼까?

 

 

내려가다 돌아보니 정말 "막혔니?" 소리가 절로난다.

메아리의 대답은 "막은데미"하고 들리듯 하다..ㅎ

이 길의 코스를 바꾼 이유는 막현리 삼거리부터는 차길을 따라 성당까지 가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긴 같은 이유로 나도 여기서 되돌아간다..

 

다시 좋은 날 잡아 새코스를 따라 진산 순레길 다시 걸으러 오리라..

 

윤지충..

그는 남인 거두 윤선도 집안으로 윤두서의 증손자이다.

정조시대 24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유생이었다.

그는 25살에 사촌인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를 알게되어 3년간 교리공부후에 28살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동생, 외종사촌 권상연에게 전도한다.

1790년 그의 나이 31세 때 북경 주교 구베아가 조선카톨릭 제사금지령을 내린다.

그러자 그는 지침에 따라 집안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지금도 제사문제로 집안에 분란이 그치지 않는데, 200년전 유교 그중에 강경한 성리학 시대에서는 온 사회가 경악할 일이었다.

이듬해 그의 나이 32세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상례는 갖추었으나,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의식은 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유박해가 시작되엇다.

그는 33살 나이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고, 그 머리는 9일동안 효수되었다.

그터에 전동성당이 세워졌고, 그가 살던 진산면 지방리에는 진산성지 성당이 세워진 것이다.

당시 진산군은 5년간 진산현으로 강등되고, 진산군수는 유배를 당하였다.

2014년 윤지충은 조선카톨릭 최초의 순교자로서 복자 반열에 올랐다.

 

제사금지령..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42년 칙서 <엑스 쿠어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를 통해 조상 제사에 대한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에서는 준수 여부에 논란이 있다가 1790년 북경주교 구베아가 재차 제사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이 제사금지령은 교황청이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공포하면서 폐지되고 조상제사를 허용하였다. 

물론 교황은 1936년 일본의 신도예식도 허용하였다.

 

***

카톨릭의 순교자, 박해자에 대한 끝없는 추모를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그에 100분지 1이라도 우리 정부는 배워야 한다.

나라를 위해 싸웠던 국군포로의 송환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고 할 것인지.

눈만 뜨면 우리도 못맞는 백신을 북한에 못줘서 안달하지 말고..

대청호 걷기에 나섰다..대전 동구 찬샘마을로 간다.

오랜만에 가니 변한 것이 눈에 띈다. 마을에 넓은 주차장이 생겼다.

 

쇠점고개 올라 가는 길은 변함이 없다.

능선에 오르니 놓고산성이 180미터 남았다.

그런데 이 표지판에서 직진방향인 냉천마을쪽에서 올라오게 될 줄은 이때까지 몰랐다.. 

 

목적지인 노고산성으로 오른다.

 

노고산성에는 슬픈 백제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성왕시절 대청호의 바닥인 금강이 백제-신라의 전선이었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시작된 성왕의 복수전..

성왕이 옥천 관산성 아래 금강지류 서화천의 구진벼루에서 신라 김무력의 부하 매복에 걸려 전사하자,

이 지역에 주둔하던 백제의 주력부대는 비참하게 괴멸되었다..

그래서 핏골, 백골산성 등의 지명이 생겼다..

 

견두산성 - 노고산성- 성치산성 등은 후방 계족산성의 전초 보루 쯤되는 것 같다.

 

노고..할미바위.. 

 

오랜만에 오니 바뀐 부분이 조망처에 종이 설치되었다..

소원의 종이란다..

 

종을 세번 친다..

자유, 자긍, 자적을 되새기면서..

 

찬샘정으로 하산한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대청호 오백리 2구간, 좌측으로 가면 3구간이다..

 

찬샘정 옆에 대청호에 고향을 받친 실향민의 눈물어린 넋두리가 비가 되어 서있다..

 

이 표지판에서 쇠점고개로 올라가려고 들어갔다가 길을 못찾고 내려왔다..

 

 

 

다시 좀더 가다가 예전 표지판에서 찬샘마을 1.3km 표시를  보고 들어가는데, 주민이 길이 철조망으로 막혔다며

옆 능선길로 가라고 한다.

 

올라가보니 좀전에 회군했던 그 자리에 또 왔다는..

그 자리에 앉아 점심요기 하던 사람이 또 오셨냐며 웃는다..

"분명히 길이 없는데.."하고  궁시럴대니..

그 사람왈.."우리가 그쪽에서 내려왔는데, 길은 있지만 좀 저기해유"

그 사람말 믿고 다시 간다..

 

하지만, 남의 묘역으로 들어가서 해메다 길을 막은 주민들을 원망해단다..

돌아나가다가 붉은 시그널이 보이는 길로 따라들어가니 희미하게 길이 이어진다..

또 다시 헷갈리는 구간에서 낯익은 노란 시그널을 발견했다..

 

길 같지 않은 저기한 길을 헤치고 올라가니 능선이 보인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들었다고 생각하고 찾으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엔 길이 분명히 있다는 말을 듣고 찾으니 길이 보였다.

어디 길뿐이랴~

 

처음 올라가면서 보았던 표지판을 다시 만났다..

그때는 무심했는데, 이번에는 반가운 유심으로 만났다..

 

화도나고 검증차원에서 쇠점고개에서 냉천방향으로 직진해본다..

 

 

분명 길은 이어지는데..ㅜ.ㅜ

 

<오늘 걷기> 찬샘마을 - 쇠점고개 - 노고산성 - 찬샘정 - 냉천 - 산길 - 쇠점고개 - 찬샘마을 약 7km

 

앞으로는 찬샘정에서 좌측방향으로 돌아 당산고개로 넘어와야겟다..

조선은 성리학으로 일어나 성리학만 모시다가 위선에 빠져 망하고 팔도에 구곡만 남겨 놓았다.

그 많은 구곡이 양반 체면 살려주는지 청양도 지천구곡이 있다하여 찾아 가본다..

내비에 지천구곡을 치자 안내하여 오니 출렁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물레방아간 다리"라고 써있다.

 

지천은 칠갑산에서 발원하여 청양군을 휘감아 돌아 금강과 합류한다..

 

이곳 지천구곡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구곡을 설정하여 생긴 곳이 아니라  해방이후 지천의 물놀이 하고 좋은 곳을 그냥 지천구곡으로 부르는 듯하다..

 

출렁다리를 건너가 강가를 걸어가니 물레방아가 나온다.

여름에 물놀이하는 물레방아 유원지인듯하다..

 

지천에서 참게가 많이 잡히나 보다.

게의 노래도 있으니..

거랑방이는 무슨 뜻인가??

 

오후 날씨가 13도나 된다..

20년만의 한파가 닥치더니 갑자기 89년만의 고온으로 치솟는다. 

지구 온난화가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해마다 롤러코스터의 강도는 세진다고 한다.

 

기후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잔빙 속에 오리는 그저 한가롭다..

 

지천구곡이 길로서 존재하려면 강벼랑에 데크길을 놓거나 강뚝길로 까치내까지 이어야 할터인데, 경제성은 없어 보인다.

 

지천을 따라가다 보면 옛 다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강변길이 그럴듯하게 보여 차를 세우고 걸어 본다.

 

 

이 곳이 구곡길로 살려달라고 말하는듯하다..

 

여기서 강따라 산으로 벼루길을 내야하고..손이 많이 가야한다..

현재 난 길은 산속 농토로 가는 길이란다..

 

돌아가는 길이 지천이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나라 돈이 남아 돌아가는 때가 오거든 이곳에도 지천구곡길을 내주기 바란다고..

 

저녁 햇살에 갈대가 흰머리 날리며 섰다..

 

참고로 상류에는 회룡대 (위)가 있고, 하류에는 까치내 칠산갑 오토캠핑장 (하)가 있다.

 

동북 원정다니느라 서방 순수가 소홀하다는 느낌이 들어 말머리를 돌렸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심정으로 정한 곳이 청양이다..ㅎ

요즘 처럼 괴질이 난무하는 시절에 장승공원이 느낌이 온다..

 

이런 장승을 동네마다 세워놓고 "이 넘에 썩을 넘아! 썩 사라지겠느냐" 노래 틀면 코로나 역신이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을까?

가만히 거리두기만 하고 있으면 괴질이 사라지나?

사라지라고 노래를 해야 사라지지..

 

이 공원에는 각국의 장승급도 참가했다..

 

보니 AI 퇴치 장승도 있고, 구제역 퇴치 장승도 있다..

금년 대보름 장승 깍을 때는 코로나 퇴치 장승, 썩을 넘아 썩사라지거라 장승도 깍아 세워주시길..ㅎ

 

언제 봐도 자유를 향한 비상이 느껴지는 솟대..

 

신축년에는 코로나를 구축하고 자유를 되찾자..

 

장곡사를 향해 걷는다.

솔바람길 2구간이라고 써있다..

 

된장, 메주 가득한 곳을 지나면 콩밭 매는 아낙네가 나타난다..

 

창곡사 가는 길에 김삿갓도 동행한다..

 

장곡사 하 대웅전..조선 중기에 지어졌다.

 

장곡사 글씨는 김종필이 썼다.

5.16, 유신체제에 관여하고 "유신본당"이라고 당당히 밝히고도 운동권 욕도 먹지 않은 사람..

DJ와 연합한 공덕이란다..

 

 

상 대웅전..

통일신라 문성왕때 보조선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 때 상 대웅전이 건립되고 조선말에 고쳐 지었다.

조선 중기에 영험을 믿는 신도가 증가하자 하 대웅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원래는 절만 보고 내려가 다른 곳을 탐방할 계획이었는데..

높은 곳을 소망하는 동행을 배려해서 40분어치 더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로 한다.

 

거북바위..

전설은 진부하여 소개는 생략..

 

솔바람길 명칭에 걸맞게 소나무 숲길이 참 걷기 좋다.

칠갑산에 4번째 오지만, 이 쪽에서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든 시간나면 오기 좋은 곳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문법에 맞지 않지만 문장을 좋아했었지..

혼자서 가라는 말에 끌렸던 것이리라..

 

 

다시 돌아온 장승공원..

당부하고 간다..

"썩을 넘! 꼭 퇴치해 주소서"

 

담에는 사찰로 - 장곡로로 이어지는 솔바람길 2구간을 완주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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