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림박물관 정경)
중국 서안에 비림(碑林)이 있다..
서예대가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을 모아 놓았다는 곳이다..
그 비림을 본떠 우리나라의 역대 위인, 서예가, 왕, 고승의 필적을 새겨 모아 놓은 곳이다..
보은읍에서 수한면쪽으로 2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저수지를 지나자 마자 우측에 자리잡은 "한국비림박물관"은 폐교한 학교시설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담벽, 건물벽에 석판을 붙이거나 걸어놓았다..
글씨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런 횡재가 없다..
사실, 이번 나들이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물론, 동행한 잠벗은 차안에서 홀로 잠들었지만..
(강감찬 장군의 글씨)
강감찬 상원수는 20만의 병력을 지휘하여 10만의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한 명장..
그 공으로 내려진 벼슬의 이름이 어머어마하다..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 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 개국후"
과연 그의 글씨도 활달하고 호방하다..
(서산대사)
그 다음으로 눈을 끄는 것은 서산대사의 글씨다..
길을 가다가 낮닭우는 소리 듣고 확철대오하였는 고승..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킨 일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 공에 대한 선조의 보답은 이런 벼슬이다..
"국일도대선사 선교대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하지만, 도통한 분이 이런 벼슬을 좋아했을리 없다.
그가 열반 직전 자신의 영정 뒷면에 적었다는 글씨이다..
"80년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후에는 내가 그로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창암 이삼만(1770~1847)은 서예사에서 후학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그림자에 묻혀버린 명필들이다. 조선적 특색을 표현하는 진경 문화가 무르익은 18세기 영정조 시대 두 대가는 동국진체라는 조선풍 서체로 일가를 이룬다. 하지만 일생은 재앙과 절망으로 가득했으니, 역적으로 몰린 원교는 2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객사했고, 창암은 약초를 캐어 연명하며 나뭇가지와 지팡이로 글씨를 수련해야 했다.
명문가의 자제로 재주까지 타고나 호의호식하던 추사..
그가 잘나가던 기고만장한 시절에 원교 이광사가 쓴 전남 대흥사의 대웅전의 현판을 떼어버리라고 할 정도 였으니,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는 시골 초야의 서예가 창암의 글씨야 우습게 알았으리..
하지만, 추사도 제주도 유배 생활하면서 수양이 되었는지 유배 이후에는 위 2분의 글씨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담징의 그림)
일본 법륭사의 금당벽화 "사불정토도"로 유명한 담징의 그림이다..그벽화의 일부 " 관음보살상"이다..
교과서에서 말로만 듣던그림을 이제사 본다..
(박정희, 육영수 부부)
비림박물관에 한 부부의 글씨가 있다.
유신시절 어느 개그맨이 라디오 방송에서 간도 크게 이런 개그를 했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부부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육 박 전"
다음날 그는 방송계에서 사라졌다..
유신시절 대학 "인간과 국가"라는 강좌에서 레포트 과제 제목이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였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지만, 3선개헌, 유신헌법 등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후퇴시키면서, 운동권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었고, 그 인과는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따님은 이번 경선 승복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고양에 기여하였다.
미국의 존 메케인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효율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이어야 한다.."
어째거나, 박 대통령의 글뜻은 이렇다.
"관이 깨끗하면 백성은 스스로 편안하다."
미인도를 보자..
"정원에 핀 매화는 귀인과 같고,
옥비는 말 없이 스스로 예쁘네"
(정지용 시)
흑백의 숲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고인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곤, 흐믓한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