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손인 금달주 등이 그의 유고집 수경재 유고를 엮어 후세에 전함으로써 그의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
그의 묘소도 이지당 부근 산에 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 1901년에 금씨, 조씨등 4문중이 힘을 모아 지었단다.
수경재 금봉의의 집안도 힘을 보탰으리라.
정갈한 아궁이와 솥단지가 인상적이다.
이지당..우암 송시열의 글씨..
그의 의미는 이렇다.
"高山仰止 景行行止"
"높은 산은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길은 따라 걸어가지 않을수 없다."는 시경의
8자 한문 글귀 중 2 지자를 따서 이지당이라고 한 것이다.
고산앙지란 사마천의 사당에도 붙어있는 위인에 대한 찬탄 구절이다.
금봉의가 20세 되던해 80세의 스승 송시열과 문답한다.
"입도(入道)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사계 김장생 선생은 사람을 가르칠 때 소학을 우선으로 했다"
"행기(行己)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경(敬)만한 것이 없다 "
"구체적으로 어찌합니까?"
"알기 쉽게 말하면, 무잡언(無雜言), 무잡행(無雜行), 무잡사(無雜思)니라"
21세 되는 해 81세의 노스승 송시열이 그에게 명성양진(明誠兩進) 경의개립(敬義皆立)"이라는 여덟글자와 수경재(水鏡齋)라는 당호를 써주었다.
<출처: 충북대 김용남 교수 논문, 수경재 금봉의의 삶과 시 참조>
"밝음(지혜)와 정성이 나란히 진보하고, 경과 의가 함께 확립되엇다"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것이 아닐까?
우암대학교의 졸업증서 같아 보이기도 하다..ㅎ
각신서당..
중봉 조헌이 가르친 제자들은 아마 임진년 금산전투에 거반 따라가서 전사했을 것이다.
중봉 조헌이 이지당에서 지은 시
水麗山明地
風高葉落秋
徜徉提督趙
邂逅廣文周
幸値仙翁集
因携童子遊
悠然成一醉
乘月步長洲”
물빛 곱고 산 밝은 땅
바람 높고 잎 떨어지는 가을 배회하는 조제독
주광문을 해후했네 다행히 신선들 모인 때에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한가로이 모두 다 한껏 취하고서
달빛타고 긴 모래톱 걷는다네
후날 송시열이 위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엇다
<공경하며 중봉 선생의 이지당(二止堂) 운을 따라 김 사군(金使君) 정평(正平) 만균(萬均) 에게 보내다>
新構臨淸泚 山頹問幾秋 天衢箕尾遠 人世歲星周 事業朱書裏 淵源德水遊 欲陳明酌薦 蘋藻採芳洲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했으니 임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하늘 거리에 기성 미성이 멀고 인간 세상에는 세월이 흘렀구려 사업은 주자의 글 속에 있고 연원은 율곡에게 받았어라 맑은 술잔 올리고자 마름을 물가에 캐었노라
이지당교를 건너 대청호 오백리 8구간을 걷는다.
서화천 건너의 이지당이 멋지다.
우리 산하에는 역시 우리 한옥이 어울린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풍광에 어울리는 고인의 시가 있다.
수경재 금봉의의 한시를 읽어보자
두 분 현인 함께 이미 멀리 가시고 대 앞의 버들 몇 번이나 봄가을 맞았던고. 도덕은 子思와 孟子를 근원으로 삼고 연원은 孔子와 周公을 조종으로 삼았네. 처량하게 산수마저 목 메이고 학과 원숭이 노니는 적막한 곳. 슬프다, 사람들 어디로 갔나 물가에 흰 갈매기만 변함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