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산 정기봉 걷기에 나섰다..

대전둘레산길 3코스에 해당한다..

차를 만인산 휴게소 앞에 세운다..

동행은 호떡에 필이 꽂힌다..




봉이 호떡..봉이 김선달은 아니고, 휴게소 주인장 이름을 딴 것이다..

설탕물 흐르는 호떡을 입에 물고 가는 출발, 나쁘지 않네..





일단 휴게소 옆 생태탐방로를 통해 푸른 학습원으로 올라 간다.




거기서 시작되는 계단..

능선을 타면 대전 둘레산길 3코스와 만난다..




정기봉은 대전시에서는 식장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뿔뚝 솟은 형태라 쉬엄 쉬엄 올라가야한다..





정상에는 봉화대터가 있다...

정기봉 이름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일단 만인산인지 태봉산인지 부터 논란이다...

고려시대에는 만인산이라 불리고 이곳은 성봉(星峰)이라 불렸다.

태조 5년에 함경도 용연에 있던 이성계의 태실을  이곳 산에 이장하였다. http://blog.daum.net/servan/6350611

그 후로는 태실산, 태봉산이라 불렀다..

지금은 언뜻 태봉산과 만인산을 구분하는 듯하나, 그냥 보편적으로 부르고 있는 만인산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정기봉의 이름이 원래 성봉이었다는 이유로

성봉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으나, 이제 정기봉으로 굳어진 것을 복원하는 것은 어색하고 현실성도 없어 보인다..




정기봉 정상에서 보니 뭇 능선이 푸른 연꽃처럼 보인다..

그러니 저 쪽에서 보면 이곳도 그렇게 보일테지..



정상을 지나면 길은 내리받이로 가파르다..

마지막 단풍이 위로한다..

아니 내가 위로를 해야지?




다 내려오면 길은 다시 오르랑 내리랑한다..



좌측은 박수근의 그림 같고, 우측은 이인문이 그린 소나무 같다..





일정상 반나절 걷기로 종료하기 위해 좌측 골냄이 부락으로 내려간다..




원래 목표인 머들령은 2.4km나 더 가야된다..

후일로 미루고..



낙엽밟는 소리가 브라스 밴드처럼 요란하다..

길은 잘 보이지 않는데 노란 둘레산길 표시가 효자노릇한다..



허접한 결말..

큰길로 향한다..




아 근데, 이 동네 개판이다..

좌측에 백구 3마리, 우측에 흑구 1마리가 왕왕거리고..전봇대 거리 만큼 촘촘히 개들이 늘어서서 짖어댄다..

이 길 통행을 막으려는 누구의 심보같디도 하다..ㅎ



개소리에 지쳐 감도 시들어 가는듯..ㅎㅎ



큰 길 입구에서 만난 단풍나무가 위로한다..




차도에서 좌측방향으로 걸어 신흥초등학교 앞에서 501번 버스를 타고 만인산 휴게소로 복귀

차를 몰고 점심 먹으로 옛터로 간다..




점심 잘 시켜먹고 장작불을 쬐며 쉬다가 주변 산책을 한다..







멋진 늦단풍을 만났다..

우리 인생 이정도로 살자..






<오늘걷기> 만인산 휴게소 - 푸른학습원 - 정기봉 - 골냄이재 - 골냄이부락  약 6km 



요즘 계속 폭염경보가 울려댄다..

야외활동을 자제하란다..그럼 집에서 더위와 싸우라는 건가?

앞으로 원자력 발전을 중단하면 그 비싼 전기값은 어찌 감당하려고...

이럴 때 계곡이 최고다..



원래는 괴산 쪽 계곡에 갈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생겨 집 근처에서 그늘 좋은 계곡을 궁리한다..

답은 원래 정해져 있었다..

식장산 세천계곡이다..



입구 생태공원에는 7월 중순인데 아직도 연꽃이 피지 않았다..




역시 그늘 길은 기대를 어기지 않았다..

물가에 앉아 잠시 쉬면서 이곳 단점은 여전하다는 것도 느낀다..

물가에 모기가 많다는거..ㅎ





오늘은 계속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간다..

그늘이 50%라면 물소리가 주는 청량감은 30% 정도 하는거 같다..





독수리봉 직전 그늘 좋은 곳에서 늘어지게 한숨자고...



독수리봉에 오르니 서대산이 땡볕에 고생이다..

열사병이라도 걸리지 않을지..ㅎ



오랜만에 구절사까지 왔다...

하지만, 매번 구절사를 구경한 적은 없다..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절은 산신각이 인상적이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 세천공원으로 내려간다..

중간에 물 좋은 곳에서 산모기에게 보시하고..




모기에게 보시하는 보살들이 많다..ㅎ



이 더운 날 살 안찌는 커피보다는 시원한 냉면을 먹으러 간다..

원미면옥에 가니 왼쪽 식당은 대기표 81번을 주는데, 오른쪽 식당은 빈자리가 많네..

어쨋거나, 착한 가격에 냉면 한그릇하고 돌아선다..



<오늘 걷기> 식장산 세천공원 주차장 - 독수리봉 - 구절사  - 세천공원 주차장  약 10km



대전 걷기, 적오산- 금병산을 걷기로 한다..

적오산으로 오르는 길은 전자디자인고나 아주미술관에서 시작하는데, 오늘은 전자디자인고 방향에서 시작한다..



정식 출발지는 에덴 정류장이다..

호모 데우스 책에 의하면, 인간이 에덴에 살 때는 짐승들과 소통을 하엿다..

그래서 뱀이 이브를 유혹할 수 잇었다..

그러나,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은 시비, 염치를 알게 되고, 결국은 낙원을 떠나는데,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하던, 목축을 하여 먹고 살게된다..

이 장면은 인류의 농업혁명을 상징한다..

농업혁명의 결과 인간과 신의 독점계약이 체결되고..

짐승들은 말문이 막히고 인간과의 소통도 단절되고, 오직 인간의 정복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많이 먹게 되어 지식이 늘고 과학혁명이 이루어지자, 신도 말문이 막히게 된다...

이제 인간들의 모노드라마시대가 되었고,

머지않아 생명의 나무에 접근하여 생명과를 따먹게 되면 인간이 신으로 등극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호모데우스의 미래상이다.. 



적오산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그런데, 사람과 개가 무리지어 내려오다가 개들이 분리되어 새끼들은 위로 달아나고, 어미는 밑으로 달아낫다가,

다시 서로 만나려고 앞뒤에서 다가오니..엄칭이 신경이 쓰인다..




능선에 오르자 저멀리 적오산성이 보인다..

백제시대 산성이란다...

백제 시대에 대전 부근에 40여개의 산성이 있어 신라와의 요충 탄현을 철벽방어 하였단다..

그러니. 백제 멸망시 신라가 탄현을 무사 통과하였다는 것은 미스테리다..

오히려 탄현을 우회하여 황산벌로 진출하였다는 설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용바위로 향한다..

전에 다리 부실할 때 이 지점에서 회군하였는데, 이제는 건각이 되어 용바위로 진군한다..




원자력 연구소가 보인다...

원전..

요즘 탈원전 운운하는데, 원자력은 현대에 개발한 불이다..

원시인이 불을 안전하게 다루는 법을 발전시켜 이제는 불을 라이터 크기도 통제할 수 잇게되엇다..

물론 가끔 대형화재가 나고 인명피해도 크지만, 우리는 불을 포기하지 않앗다..

원시인류가 불을 무서워 포기하였다면 지금의 인류 문명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자력도 마찬가지다..기술의 진보에 따라 불처럼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 

미리 두려워 원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원시인보다 무지한 현대인이 되어서은 안된다..



적오산을 힘들게 오른만큼 다시 가파르게 내려간다..

그리고 만나는 자운대와 금병산 줄기..

적오산과 금병산이 갈라지는 대목이다..





금병산 용바위를 오르는 길도 가파르게 올라간다..




숨찬 오르막 끝에 만나는 금병산 제1봉 옥련봉 비석..

옥련..옥수레..

수운교는 동학의 일파로, 1923년 서울에서 개교하였다가 1925년 이곳 금병산 아래 추목동 숯골로이전하여 후천 5만년을 다스릴 도량으로 천단 도솔천궁을 건립하였다.. 





전망대에서 자운대를 바라보며 호령해본다..

"전체 차려어엇!"



또다시 오르막이다..이번에 친절한 줄까지..

오르막 끝이 용바위 고개이자 제2봉 일광봉이다...





이 용바위 고개에서 우(보덕봉)- 좌(금병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대전둘레산길 7구간이다..



이곳 내리막은 친절한 계단이다..





3봉 공덕봉 표지는 보지 못하고 4봉 표지를 만났다..도덕봉..




아래 도솔천의 기운을 받았는지, 소나무가 울울청청하다..



6봉은 연화봉이다..





금병산 정상석이 잇는 곳이 제7봉 운수봉이다..




앞쪽으로 구봉산과 장태산, 멀리 대둔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금수봉, 갑하산, 우산봉 뒤로 계룡능선이 인다..




표지판 노루봉이 12봉 창덕봉이다..



8봉을 지나치고 9봉가기 전에 수운교 방향으로 하산한다..

12봉을 다 걷기에는 체력이 부친다..









석종..

천단에서 이것을 보기전에  석종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삼국유사 손순매아 편에 석종이야기가 나온다..

경주 모량리에 사는 손순이 노모를 봉양하는데, 어린아이가 밥을 뺏아 먹으므로, 자식을 땅에 묻고 노모을 봉양하려고 하엿다..

아이를 데리고 취산 북쪽 들판에가서 땅을 파니, 석종이 나왔다..

부부는 기이하게 여겨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석종을 들보에 달고 두두리니, 그 소리가 임금(흥덕왕) 귀에 들렸다..

왕이 사연을 듣고 효자라고 표창하고 집 한채와 메벼 50석을 하사하였다


나는 위 이야기를 듣고, 석종의 모양이 종 모습일거라는 형상에 집착하여 믿지 않았는데, 여기 석종처럼 소리나는 현상에 맞춰보니

비로소 위 설화가 거짓이 아님을 알겟다..





이 천단에는 종이 있는데, 6.25때 탄피를 녹여 만들엇다고 한다..

이 종소리 울려 전쟁없이 평화통일이 되었으면...








<오늘 걷기> 대전전자디자인고등학교 옆 골목길 - 에덴정류장 - 적오산성 - 금병산 제1봉 - 용바위고개 - 수운교  약 8km



날이 워낙 춥다..중학교 다니던 그때 처럼 춥다..

안성에 가려다가 가까운 근교를 걷기로 한다..

계족산으로 간다..


산디마을 오토캠핑장에 주차한다..

이리 추운데 오토캠핑장에 텐트피고 캠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추위를 견디는 비결은??

설비가 좋아졌겠지..난로 굴뚝이 보인다..



빙설사이로 물이 흐른다..

아무리 추워도 세월은 가고 봄은 오는 것이다..




이 길도 소문이 났나..

개천정비 공사 공고가 붙었다..

제발, 그냥 환경을 살리고 원형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으면..



길은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고요하지만

산성은 푸른 하늘을 이고 날아갈듯하다..




산실제길이 하얀 분칠을 하고 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심한 님은 언성을 높이며 세상푸념을 늘어 놓는다..



임도삼거리 오뎅집도 무시하고 내쳐 봉황정으로 오른다..

다리가 부실하던 시절 가보고 무시하고 다니길 6-7년이 지난 것같다..

오늘 날도 춥고 기분도 추우니 험한 길을 오르리라..





갑천 산책길에 올려다보던 작은 모자를 이제사 오랜만에 마주하네..



봉황정 전서 글씨는 정향 조병호 선생글씨..

그는 "처음처럼"글씨로 유명한 신영복의 글씨 사부..

신영복이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일 때 만나서 죄명을 듣고는.."유배온 것이군"했단다.. 

그리고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위해 서예선생노릇을 한 사람이다..

나도 그의 그의 글씨 한점을 가지고 잇다..

"도심일명월(道心一明月)"

도 닦는 마음은 밝은 달과 같다..


스스로 그 글귀의 댓귀를 달앗다..


그 달빛 천강에 아니 비췬데 없지만

급류 따라 흐르지 아니하고

그저 인연따라 즐길뿐이라네..


月印在千江(월인재천강)

水急不流月(수급불유월)

但隨緣樂命(단수연낙명)




봉황정기는 장암 이곤순선생의 글씨다..

현강선생의 사부니 나에겐 조사부쯤 되는 분이다..ㅎ



한때 봉황산으로 불리던 기개를 겸손하게 수행자 모드로 바꿔 계족산으로 부른다는 말이다.

그때의 기개를 정자에 담아 봉황정이라 부른다..

봉황정에서 바라보는 동,남녁으로는 좌측에 식장산이 중앙에 보문산이 보,만,식, 계를 이루고 있다..

이어 서쪽을 바라보면 계룡이 날아든다..

그리고 남서쪽의 대둔산을 줄기를 타고 흐르는 갑천과 유등천이 기각지세를 이루며 한밭이 펼쳐진다..

그 옛날 어느 도인이 이곳에 이르러 멀리 계룡을 바라보며 문득 이에 호응하여 의형제를 맺었거니 이에 이름을 계족이라 하였을지도...ㅎ

굳이 가섭이 도를 닦던 천축국의 계족산에서 따왔으리요..ㅎ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갑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땅은 모두 1묘에 소출이 1종이나 되며,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다.
또한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이 잇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계룡과 계족 사이에 대둔산 줄기에 발원하여 둔산벌을 적시는 갑천이야 말로 말그대로 갑(甲)이다.. 





봉황정에서 내려와 장동방향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대전의 지세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온다..



<죽림정사 - 임도삼거리> 구간의 중간 분기점에서 대전둘레산길 장동방향으로 직진한다..




가장 추운 날 추운 기분에 분기탱천하여 계족산 정상 봉황정을 주파하고 노곤한 몸을 뉘이고 푹 자고나니 추위와 기분은 간데가 없더라..


<오늘 걷기> 계족산 장동산림욕장 오토캠핑장 - 산신제길 - 임도삼거리 - 계족산 정상 - 봉황정 - 전망대 - 임도 갈림길 - 산디마을 진입구 - 오토캠핑장 약 8km




오랫만에 다시 찾아왔다..단재생가..

전에도 추운 겨울에 왔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그가 추운 시절에 춥게 살아왔기에 추우 계절에 와서 보아야 그의 간난고초가 조금이라도 실감될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번과 달라진 것은 생가 곁에 홍보관이 생긴 것이다..




그는 태어나 8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다..8살이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에서 성장했다..



민족사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 조선상고사는 1931년 6월부터 같은해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인데, 1948년에 이를 엮어 출간되었다.



그는 57세인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가 태어난 이곳은 할아버지의 외가(즉 진외가)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다..





8세 이후 집안 본향인 청주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간 뒤 할아버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다..

어려서 부터 총기있고, 한시도 잘 지었다...

지금으로 치면, 영어를 조기 교육하여 초등학생이 영시를 짓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 문정부가 유치원 영어교육금지 운운하는 것은 조선시대만도 못한 가소로운 일이다..





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 인생 사십 년이 너무도 지리하여

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 가난과 병 잠시도 날 떠나지 않는구나

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 한스러워라, 물 다하고 산 다한 곳

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 내 마음대로 노래부르기도 어렵구나

 

-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




"가을 밤에 읊다" (추야술회秋夜述懷)의 시가 행서로 써있다..

                                            
孤燈耿耿伴人愁   고등경경반인수   가물거리는 등불아래 근심만 가득하여
燒盡丹心不自由   소진단심부자유   일편단심 다 태워도 자유롭지 못함은
未得天戈回赫日   미득천과회혁일   하늘이 준 창으로도 밝은 해 되돌리지 못했으니
羞將禿筆畵靑丘   수장독필화청구   몽당붓으로 청구강산의 역사를 끄적임이 부끄럽구나
殊方十載霜侵鬢   수방십재상침빈   이역 땅 방랑십년 귀밑머리 서리내려
病枕三更月入樓   병침삼경월입루   병들어 누운 베갯머리 삼경의 달빛만 비쳐드네
莫說江東鱸膾美   막설강동노회미   말하지 말게나! 강동의 농어회 맛이 좋다고
如今無地繫漁舟   여금무지계어주   지금은 고깃배 맬 땅 한뼘도 없다네 



단재..붉은 마음를 간직한 사람..



생가 옆으로 산 길이어진다..

도리뫼에서 모랭이로 이어지는 길..

숫눈을 밟고 걸어간다..





쇠재 너머로 식장산이 보인다..




솔고개를 넘어 가면 모랭이마을이다..



모랭이 정류장에서 바람을 피하며 뜨거운 차와 요기를 하고  다시 생가로 돌아간다..




모랭이 동쪽으로는 금동고개로 대전둘레산길 1코스와 2코스가 이어지고..

서쪽으로 정생마을 사기점골에는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있다..




돌아오는 길 솔고개에서 바라보는 쇠재 오르는 길...




저 아래 단재 생가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의 일생처럼..

궁벽한 곳에서 추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돌아가는 길에 정생동 사기점골에 들렀다..

조선 후기의 백자가마터..





<오늘 걷기> 대전시 어남동 단재생가 - 쇠재 - 솔고개 - 모랭이  왕복 약 7km



이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길을 고르는데, 3가지 주문이 들어왔다..

1) 가까운 곳 2) 새로운 곳 3) 힘들지 않을 것

이 조건에 맞출 곳이 있을까?

우선 단재 신채호 생가 둘레길을 생각했다..너무 평탄해서 겨울엔 추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근처 천비산에 눈이 갔다..

대전둘레산길에 벗어나 잇어서 마치 서자처럼 취급받는 산...



일단 내비에 중암사를 치고 간다..정생동마을을 지나 정생지까지 간다..

정생지가 끝나갈 무렵 넓은 공터가 잇어 주차 및 회차가 편리한 곳이다..

강추위에 정생지는 거울처럼 얼어 붙었다..새 한마리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중암사 표지를 따라 올라가면 거목이 나온다..

마을이나 절이 있었다는 징표...예전에 묘각사라는 절이 있었단다..



평범한 임도 길인데, 신비암 직전에 산길로 700미터 가면 중암사라는 표지가 있긴 하지만, 일단 군자대로행이다..

소로는 내려올 때 이용하기로..ㅎ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길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 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중암사 직전의 정자 부근도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다..



동장군..이번엔 신났다..약졸들 맘껏 부리며 승승장구중이다..



멀리 식장산이 보일 즈음 부도탑이 나타난다..





홍파당이라는 글씨가 뚜렷한 부도탑..

정조8년(1784)에 건립된 탑비로 보아 오래된 부도탑들이다..




순서로 보아 수월당 부도탑이다..

수월..문리버와 사형지간 같은 당호라 더 정감이 간다..ㅎㅎ




오래된 절터에 비해 가정집 같은 법당..





산너머 신대리 문암에 사는 박보살..50여년을 이절에 봉사하였단다..

우리 집 보살보다 한수위네..ㅎ





이 묘한 비석 비스무리한 돌의 정체는 정료대(庭燎臺)란다. 

기둥위에 판석을 올려놓은 형태로 옛날 조명시설로 야간 긴급상황시  이곳에 관솔이나 장작을 쌓아 불을 피웠다.





비석에는 부실(副室) 유인(孺人) 영산 신씨 영세원향비라고 씌여 잇다..

추측컨대, 진주 목사의 소실인 영산 신씨가 자손도 없이 죽게되자 1868년 이 절에 재산을 시주하고 영원히 향을 올려달라고 한 것 같다..

1868년이면 고종 5년으로 병인양요 2년 뒤이며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해로 전국이 어수선 할 때다..

조선 시대 1냥의 가치가 2만원 -5만원이라는 견해에 의하면, 460만원 - 1150만원 정도 되는 것 같다..

내 생각엔 1000만원 정도 가치가 되어야 영세원향비를 세워줄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땅을 시주받고 열심히 수행하여 부도탑이 즐비한 한 절이었으리..



산신각에는 영규대사의 영정이 있다..



법당 옆 푸른 대숲 사이로 영규대사 순의비가 있다..

영규..

그는 서산대산의 제자로서 갑사 청련암에서 수행하다가 거병한 최초의 승장이었고, 조헌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엿다..

그리고 조헌과 함께 금산으로 진군하여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전을 벌여 조헌의 700의병, 영규의 800 승병이 전사하엿다...

그런데, 금산에는 700의총만 있는 것은 부당하는 주장이 있다..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비..의를 위하여 죽엇다는 것이다..

순교는 아니지만, 나라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보살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 여기에 그의 비가 있을까?

그는 금산 연곤평전투에서 복부에 부상을 입고 이곳 까지와서 피묻은 갑옷을 벗어 놓고, 공주 계룡면 월암리까지 가서 숨을 거두었단다..

왜 공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까?

일설에 의하면, 충청감사 윤선각이 조헌의 의병을 견제하는 바람에 소수의 병력으로 금산 전투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엇기에  공주감영으로 감사 윤선각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이곳을 거쳐 공주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부상악화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암사에는 영규대사의 갑옷이 보존되어 오다가 1932년 화재로 소실되었단다..



천비산 등산로는 절 입구에 잇다..

천비산(天庇山)..하늘을 덮는 산??

지명 유래에 관하여는 설명된 자료가 없다..

그러나, 둘레길 걷기를 마칠 즈음 스스로 자득한바가 있다..

중암사를 감싸안은 산세가 서북풍을 막아주고 남동향으로 따스하니 마치 온실 안에 들어잇는 형국이라..

그러니 하늘을 덮은 산이라하겠다..




능선에 이르는 오솔길은 낙엽으로 만들어진 양탄자 길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이 섬세한 그림같다..

`




능선에서 정상까지 700미터..




정상 옆 벤취에 햇볕이 봄볕이다..

몽골 보드카를 반주로 점심 따스하게 챙겨 먹고 나서니, 쓸데없이 집에서 날씨 추운거 걱정했다는 생각..




나무사이로 언듯 보이는 것이 다랭이 논인가?? 묘원인가??



보문산, 계족산, 식장산을 한꺼번에 보기는 처음이다..



정상에서 안산쪽으로 평탄한 능선이 일순 응달 눈길을 가파르게 내려간다..

얼릉 아이젠을 찬다..

거기서 반가운 이름을 만난다..

한 때 그를 따라 울릉도 일주와 지리산 둘레길을 걸엇는데..

그는 지금 어느 길위에 잇는지.. 

그의 불러그에 가면 2015년 해파랑길 이후에는 행적이 묘연하다..




이어 계단을 내려오면 길은 안정궤도를 가는듯..





그러다가 드디어 정생동 표지판을 만난다..

사거리인데, 반대편은 안내가 없다..참고지도를 보면 반대편 길로 가면 미륵사로 이어지는 것 같다..




정생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희미한다..

네이버 지도상으로는 중암사가는 임도와 만나게되었는데..



중간 묘지부근에서 길이 자취를 감추고 이 바위 앞에서 헤매다가 네이버 지도의 현위치 기능을 이용하여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며 길인듯 아닌 듯한 길을 발에 맡기고 내려갈 밖에..



과연, 문중묘지 옆으로 임도와 만난다..

이곳이 지도상으로 서당골이다..




다시 임도를 걸어 중암사로 간다..




중암사 가까이와서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니

뒤로 조금 되돌아가면 임도를 굽이돌지 않고 더덜이골을 통해 다이렉트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잇다..

망설이다가, 새로운 경험을 선택햇다..



과연 절묘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낙엽속에 다듬어진 계단의 흔적도 잇고..

무협지에 이런 오솔길을 헤메다가 문득 길이 끊어진 곳이 동굴이 있고, 거기에 비급이 숨겨져있던데..ㅎㅎ



신비한 호기심을 안고 내려가는 길..계곡옆을 지나다보니 길을 막아놓았다..

어찌하나 되돌아가기엔 길이 너무 가파르고., 네이버 지도는 길이 잇다고 주장하고..

얼어붙은 계곡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겨우 겨우 계곡을 건너고 보니 실가닥같은 길이 나타난다.. 



그리곤 또다시 잘 다듬은 계단길이 나타나니

마치 얼르고 달래는 형국의 길이다..



심심산골에 갇힌 거 아닌가 하는 순간 아래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면서 내려다 보니 신비암의 개와 주인장이 보인다..

안심이 되는 순간..백구가 자꾸 접근하면서 짖는다..이번에는 개에게 물릴까 걱정..ㅎㅎ




내려오니 임도 오르다 만난 갈림길 표지판 옆이다..

생각컨대, 임도를 새로 개설하기 전에 중암사에 오르던 옛길인가 본데, 좀 정비하면 좋은 걷기 코스가 되련만,

지금은 너무 황폐하고 중간에 끊겨 위험하기도 하다..

도에 비유하면, 임도를 굽이 도는 것은 돈오점수요, 오솔길로 바로 오르는 것이 돈오돈수라 할까?





<오늘 걷기> 정생지 - 임도 - 중암사- 천비산 정상 - 안산 쪽 능선 - 정생동 표지판 하산 - 임도 - 중암사 직전 오솔길 더덜이골 하산 - 정생지 약 11km






대전 무수동에 갔다..

유회당둘레길을 개척해보려는 생각이다..



무수동..무수(無愁)..근심이 없는 마을이다..

원래 무쇠골..수철리(水鐵里)라 불렀는데, 숙종 때 유회당 권이진의 백부인 권기가 정착하면서

그의 호인 무수옹을 따라 무수동이 되엇단다..



250년 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옆에

원두막인줄 알앗더니 이름 많은 정자네..

남향으로는 인풍루(引風樓)..바람을 불러오는 누각..

북향으로는 광영정(光影亭),연못의 햇빛과 구름을 보는 정자..

서향은 관난헌(觀欄軒), 외양간 바라보는 집..

동향은 수월난(受月欄), 달맞이하는 난간..



광영정 좌측 길로 오른다..


멀리 유회당이 보인다..

유회당은 조선 영조때 호조판서를 지낸 권이진(1668년∼1734년)이 1714년(숙종 40)에 지은 건물이다..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사승(師承)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윤증과 송시열이 반목하여 노론, 소론이 갈릴 때 어찌 처신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무수동은 연산의 명재(윤증)고택과 우암의 난간정사와 중간쯤 위치하고 있다..ㅎㅎ



지도상으로는 마을 좌측 끝에도 산길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보니 길이 보이지 않고 개소리만 요란하다..

부득히 유회당 옆 여경암 가는 길로 올라간다..



유회당의 근원이 된 권이진 부모의 묘소




당근 좌측 산길로 가야겠지??




호젓한 길 끝에 쌍갈래 길이 나온다..

좌측은 보문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고, 우측은 여경암으로 간다..

일단 여경암에 들른다..




여경..이라는 이름에서 과거 합격을 위해서 공부하던 곳 같다..

조선시대는 최소 4대에 1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으니, 과거공부에 매진할 밖에..



아마, 과거공부가 의미가 없어진 후로 불당으로 사용되나 보다..



유회당 권이진의 친구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산신각..

항주대성산왕신..보문산신의 이름인가??




여경암을 지나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표식도 희미하고 길도 가파르다..

땀 깨나 흘리며 올라간다..





이 특이 나무 지점이 삼거리.. 우측이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주 등산로인데 표지판이 없어, 모르는 상태에서 좌측 길로 간다..





길이 희미하다..

중간에 멀리 보문산둘레길이 보인다..

길은 계속 내리막인데, 어디로 이어지는지 자신이 없어 돌아가기로 한다..

나중에 지도로 보니, 계속 내려가면 좌측으로 유회당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듯하고, 직진하면 버들골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잇다..





산에서 내려와 유회당을 구경한다..





조선 시대는 왜 그리 충효를 중시해는가?

민족성이 원래 효성스러워서??

민족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지금은 왜 달라졌는가?


내 생각엔 이렇다..

유학이 공자시대는 인(仁)을 중시하였는데, 증자 시대에는 효를 점차 강조하기 시작한다..

한나라 이후 유학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수인 충효의 개념을 강조하여 결국 송나라 이후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충효자를 표창하고, 벼슬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니 벼슬이 집안의 성세를 좌우하는 시대에 사대부들은 충효..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효를 강조하게 된다..

효를 조기에 세뇌하고 체득하게 만든다..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게 시켰다..


그러나, 이제 효로 얻어지는게 없는 시대가 되었다..

돈이 중요가치로 상승한다..돈과 외모로 평가받는 시대에 효는 고객이 찾지 않는 재고상품이 된 것이다..




충효문 안으로 들어서면 활수담과 석교가 잇다..

활수담(活水潭)..

성리학자들은 작명도 다 어디 책이나 글귀에서 따온다..

주자의 시 " 관서유감(觀書有感)" 에 나오는 귀절..

 爲有源頭活水來 (위유원두활수래)

 근원에서 신선한 물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라네


위 귀절의 활수에서 따와 작명하였다..


관서유감의 시 원문은 이렇다..


半畝方塘一鑒開(반무방당일감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반이랑 네모난 못이 거울과 같아서,
 햇빛과 구름이 그대로 잠겨서 배회를 하네.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느냐 물으니,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오기 때문이라네.


이 시에서 광영정, 활수담이라는 작명하게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광영, 활수 등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성리학의 개조인 주자의 위 시가 그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철학에 따라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절 주변의 산봉우리 이름이 비로봉, 관음봉, 반야봉이 많은 이유와 같다..




유회(有懷)..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이루며 두분(부모)을 그리워하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의미다..

이것도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이 집안 안동 권씨의 자랑이 광고문안보다 더 세련되었다..

1. 조선 최초의 기로소에 들어간 동고 권중화..

  기로소.. 퇴임한 나이많은 원로 대신을 예우하는 기구에 권중화가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는 태종때 영의정부사(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향약간이방이라는 한의약 관련 서적을 저술하기고 하였다..


2. 조선 최초 문형 권근..

  문형이란 대제학을 말하는데,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 삼관을 겸직하여 문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3. 최초 호당에 들어간 권채..

 湖堂(호당)..조선조 세종-숙종 간에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불렀다.

호당에 선발된 사람은 조선조 관리 중의 엘리트로 인정 받는 것이기 때문에 호당에 선발된 사실은 당연히 족보에 기록된다.

 

호당은 ‘호수가의 집’인데 두모포 즉 지금의 옥수동 한강 가(동호대교 부근)에 독서당을 지어놓고 호당이라 한 것이다.



유화당 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본다...

고인도 이런 풍광을 바라보았겟지..



유회당 마루에서 보니 좌측은 배롱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양반집이나 절에서 키우는 나무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껍질이 없어진단다..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고 여겨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는다.

또 여름 백일동안 계속 붉은 꽃을 피우니 그와 같이 수양하려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우측엔 탱자나무가 있다..가시로 가득한..

보통 탱자나무는 귀양간 중죄인들 집을 탱자 가시나무로 막는 위리안치에 쓰는데, 왜 이곳 정원에 심었을까?



유회당 권이진의 집안 내력을 보자

그의 증조부 권득기는 양명학자로 꼽히는 장유, 최명길 등과 학문적 교류가 가장 밀접한 조익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탄옹 炭翁 권시(1604년~1672년)이다.

그는 차남 권유를 송시열의 맏딸에게 장가 보내고, 명재 윤증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앗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예송논쟁)로 논쟁이 붙었을 때 서인임에도 남인(윤선도, 윤휴)의 주장이 맞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돈인 송시열과 송준길과 대립하여 서인의 공격으로 파직되었다.

권시는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으로 낙향했다. 도산서원을 짓고 13년 동안 도학과 예학에 정진했다. 그의 호인 탄옹은 탄방동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충청 오현이라고 할 때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를 말한다.

(참조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4 )


그의 백부는 무수옹 권기<1623(인조원년)~~1695(숙종21)>이다..

그는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80년 3월 경신출척으로 서인 집권시 옥사가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둔 다음 본가 탄방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철리 산골인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마을이름을 무수동이라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는 딸을 백호 윤휴의 며느리로 시집보냇고, 윤휴가 송시열 등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힐 때에도 서로 의기상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의 아버지 권유는 무수옹 권기의 동생이고, 송시열의 사위이다..

유회당 권이진이 이곳에 아버지와 어머니 송씨의 묘를 모시고..시묘사 삼근정사를 세우고, 유회당을 지었다..

어머니는 우암 송시열의 맏딸이다..

송시열은 시집가는 딸에게 계녀서(戒女書)라는 글을 써준다..

"일속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되지 마라."는 내용..


유회당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

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그후에는 명재 윤증(尹拯)에게 수학 하엿다..

그는 양명학적 경향에 관대한 가학 전통에, 우암 송시열의 교조적 성리학, 명재 윤증의 무실성향을 섭렵한뒤 

현실적인 실학의 경세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에 붙여논 현판을 보면 그가 성리학 주류를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묘소는 인근 어남동에 있는데,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찬하고 체제공이 쓴 것으로 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은 남인 탕평론자 청남쪽 사람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그의 주변 환경, 특히 외가인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고모부인 명재 윤증의 소론의 당쟁 와중에 참으로 처신하기 어려었으리라..

그러한 그의 심정을 탱자나무의 가시가 대변해주고 잇지 않을까?

찔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며 살자하고...

마치 정양용이 양수리 마재 집에 여유당이란 당호를 쓰고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하며 살려고 하였듯이..ㅎ




유회당 옆 재실인 기궁재의 대문에 붙은 입춘방..

화기자생군자댁.. 따스한 기운이 저절로 생기는 군자의 집..

춘광선도길인가..봄볕이 먼저 도달하는 재수좋은 집..



으르렁 거리는 거대한 두 소 사이에서 절묘한 삶을 살았던 인간극장의 현장이랄까?






<오늘 걷기> 무수동 무수천하마을 광영정 - 유회당 - 여경암 - 등산로 - 원점회귀 약 5km



추위가 몰려와 길이 얼지 모른다고 해서 가까운 곳을 가기로한다..

대전 동구 상소동산림욕장..



차량 내비뇬을 잘못 건드려 심통이 났는지, 가는 길도 이상하게 빙돌게 만든다..

네이버 내비를 틀었는데, 이뇬도 주차장 안내를 이상하게 상소동 낚시터 쪽으로 안내해서 들어가다가 길이 좁아 겨우 후진해서 나왔다..ㅎ

결국 오토 캠핑장 앞에 있는 주차장이 정답인데, 공연히 고생만 했다.



고생했다고 입구에 얼음들이 도열하여 머리에 땀나도록 환영해준다..ㅎ




우선 메타세코이어 길을 따라 산책길을 걷는데, 멋진 앙코르와트산 탑들이 보인다..

일단 한바퀴 돌고 다시 와서 찬찬히 보자..




산책길은 조붓하게 정다운 오솔길로 잘 단장해놨다..

누가 정성껏 돌탑을 쌓았는지..






약 4km 정도의 산책로 일주를 마치고 사방댐 근처에서 정상을 향해 등산로를 오른다..

정상에서는 만인산 방향으로 가다가 장산저수지 부근의 하늘 물빛정원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등산로 임시변통으로 만들어 가파르고 자갈밭이다..

하여 500미터 정도 오르다가 순환 산책로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산책로를 따라간다..




어렵쇼?? 산책로가 아니라 평균대 2배 정도폭의 벼랑길 수준이다..



아슬 아슬 조마 조마 길을 통과..




물놀이장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하여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한다..

그런데, 이 등산로는 무애무득한 길이라 언제 다시오면 이 등산로로 정상도전을 해봐야겟다..






다시 신비의 돌탑으로 돌아왔다..

원래 대전 동구청이 2003년에 이곳에 돌탑 1000개 쌓기 운동을 전개하엿는데,

이에 호응하여 이덕상 선생이 2003년 - 2007년 사이에 신비한 모습의 돌탑을 쌓았단다..








소싯적에 고향마을 뒷산에 돌성을 쌓아 홍수 때 산사태를 막았던 경험이 돌탑쌓기의 대가가 되엇단다..

그의 돌탑은 복을 나누는 일이다..


원래 돌탑은 선사시대의 험준한 고갯길에 쌓아서 무더기를 만들었다가 맹수를 만나면 이 돌을 사용하여 물리치고

다음 사람을 위해서 다시 돌무덤을 쌓아 놓은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러니, 돌탑은 널리 서로를 이롭게하는 가치의 출발점이다..





입구 얼음동산으로 나왔다..

얼음을 보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어릴 적 동심이 발동한 탓일까?

천진..하늘에서 바로 내려와 오염되지 않은 마음..

이해타산도 모르고, 선악시비도 끊어진 그런 마음 말이다..





<오늘 걷기> 상소동산림욕장 산책로 + 등산로 일부 약 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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